본문 바로가기
A

감자,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

by 다솜솜 2023. 1. 26.
반응형

1. 감자의 역사

감자튀김, 감자 칩, 찐 감자, 통감자, 회오리 감자, 등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감자가 있다. 다양한 형태로 먹는다는 우리뿐 아니라 감자는 전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음식이며 밀, 쌀, 옥수수와 함께 오늘날의 4대 작물로 칭해진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주렁주렁 열리는 감자는 인류 역사상 사람들을 가장 많이 구한 작물로도 명성이 높은데, 하지만 감자가 인류에 널리 퍼진 것은 300년도 채 되지 않았으며 발견된 것도 16세기가 되어서다. 남아메리카 안데스 고지에서 재배되고 있던 감자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잉카 제국을 정복하며 처음 유럽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감자의 원산지로 알려진 중앙 안데스 고지는 비가 자주 오는 우기와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건기로 나뉘는데 이런 환경에서 적응하는 식물 생태 중 하나가 땅속줄기나 뿌리에 영양분을 저장하는 것이고 감자와 같은 덩이줄기 식물의 출연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또한 감자가 출연했던 곳은 해발 4000m에 달했으며 수목이 없고 과실을 거의 얻을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그 지역 원주민들에게 감자는 귀중한 식량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한 스페인 사람이 남긴 최초의 감자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감자는 원주민들의 주식으로 사용되었고,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감자를 몇 년 동안이나 보관할 수 있는 참신한 기술까지 가지고 있다. 많은 수분을 함유한 감자는 상하기 쉽고 오랜 기간 저장하기가 어려웠는데 원주민들은 지역의 특이한 기후를 이용해 감자를 밖에 널어놓아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게 한 뒤 발로 밟고 또 건조하고 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추뇨라는 말린 감자 음식을 만들었다고 한다. 상태만 좋으면 6년도 보관이 가능한 이 추뇨는 운반이 편리해 중요한 교역품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하며 이를 통해 감자에 들어있는 독성을 제거해내기도 했다. 한편 남미에서 감자를 처음 본 스페인인들은 의외로 전혀 관심 없어했으며 이들이 감자를 처음 본 뒤 약 30년이 지나서야 감자는 유럽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계기는 단지 유럽인들이 항해 식량 중 하나로 감자를 실었던 것이었다. 원래 지역에서 잘 지내고 있던 감자가 별 임팩트 없이 유럽에 도착했는데 유럽에서는 난리가 나게 된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감자가 지닌 독성 때문이다. 감자는 싹과 잎줄기 등의 초록색 부분에 솔라닌이라는 독성을 지니고 있는데 지금도 싹이 난 감자는 먹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감자를 처음 접한 유럽인들은 이를 모르고 감자의 초록색 부분들을 먹고 탈이 많이 났다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성서에 등장하지 않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식물은 '씨앗'으로 번성하는 존재로 창조하셨는데 덩이줄기만으로 번식하는 감자는 매우 불순한 식물이었다. 울퉁불퉁한 생김새 때문에 감자를 먹으면 병에 걸리게 된다는 등의 미신도 퍼져 감자의 평판은 땅으로 떨어지고 유럽인들은 감자를 절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 와중에 일부 지식인들이 감자가 뛰어난 작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감자를 장려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중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자신이 직접 나서면 모든 국민이 따를 것이라 생각하여 상류층들을 초대해 감자 파티를 열었는데 이때 감자를 잘 모르는 요리사가 입과 줄기도 요리를 했고 이를 먹은 엘리자베스 1세는 솔라닌 중독으로 죽을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이 사건 때문에 감자의 악명은 더욱 높아졌고 영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특히 감자가 늦게 보급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럽 전반에서 감자는 가축 사료 정도로만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악명이 높은 감자였지만 점차 그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고 유럽인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되는데 바로 기근과 전쟁이라는 두 가지 계기를 통해서이다. 또한 감자 보급에 크게 기여를 한 중요한 두 인물이 등장한다. 유럽 내에서 비교적 기후가 안정된 프랑스에서도 16세기 13번, 17세기 11번, 18세기에는 16번의 기근이 발생한다. 가난한 농민들은 10년에 한두 번꼴로 심각한 굶주림에 시달려야 함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상황에서 1770년에는 특히 혹독한 기근이 발생했는데 이때 수많은 농민이 감자를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한 연구자가 감자 보급에 앞장섰는데 파르망티에라는 저명한 농학자였다. 그는 독일과의 7년 전쟁 당시 포로로 잡혀 가축 사료로 쓰이던 감자만을 먹었는데 풀려날 당시 몸이 굉장히 튼튼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감자의 훌륭함을 알리기 위해 빈민들에게 감자로 만든 수풀을 나눠주고 왕실 연회 때 감자 요리를 준비하기도 했으며 왕의 단춧구멍에 그리고 왕비의 머리에 감자꽃을 달게 하는 등 엄청나게 홍보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바로 사람들이 감자를 훔쳐 가게 하는 것이었다. 파르망티에는 부양 농장에 감자를 재배하고 파수꾼을 세운 뒤 "여기심은 감자라는 것은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한 엄청 귀한 건데 훔쳐 가면 죽는다"고 적힌 표지판을 박아두었다고 한다. 낮에는 엄중히 보초를 세우다가 밤이 되면 철수시켰는데 이때 궁금증이 극에 달한 많은 사람이 감자를 서리해 이렇게 서민들 사이에 감자가 퍼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이다. 또 다른 유명한 인물로는 비슷한 시기의 감자 대왕이라고도 불리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다. 앞서 말씀드렸던 7년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해지고 식량이 부족해진 상황에서 그는 가축 사료로 쓰이던 감자를 사람들의 식탁에 올릴 궁리를 했다. 직접 감자를 날마다 먹으며 전국 각지에 감자 보급 캠페인을 벌이고 또한 아까 보신 이야기와 비슷하게 감자밭에 군대를 배치하여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하려 했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자 무력으로 감자 재배를 강요하고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의 귀와 코를 자르는 형벌을 내리기까지도 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감자를 먹지 않았고 고심하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앞으로 감자는 귀족만 먹을 수 있다는 공고를 내리게 된다. 왠지 이 방법은 제대로 먹혔고 독일 사람들은 감자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을 극복하여 적극적으로 먹게 되었다고 하며 오늘날 감자는 독일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2. 감자 문화의 발전

이렇게 유럽에 퍼지게 된 감자는 두 가지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하나 육식 문화의 발전이다. 목축문화가 발달한 유럽이었지 겨울이 오면 해마다 문제가 생겼는데 바로 가축을 먹일 먹이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겨울을 대비해 열심히 건초를 준비했지만 한계가 있었고 따라서 많은 유럽인은 일부 가축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도축하여 건조하거나 소금에 절인 뒤 겨울 식량으로 삼았다고 한다. 근데 감자를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는데 특히 잡식성인 돼지를 1년 내내 기르는 것이 가능해졌다. 19세기 들어 감자가 엄청나게 생산되고 수요를 훌쩍 뛰어넘어 남아돌게 된 감자를 통해 돼지 사육이 보편화되었고 돼지고기 생산과 소비는 급증했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감자는 사람이 먹을 수도 있었기에 감자를 먹고 대신 곡물을 남겨 소에게도 먹이를 주는 것이 가능해졌다. 감자를 통해 유럽인들의 식탁에는 고기들로 풍성해지게 된 것이다. 그다음으로 큰 폭의 인구 증가이다. 매년 인간과 가축을 위한 식량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던 유럽의 기후와 척박한 토지에서도 감자만큼은 주렁주렁 열매를 맺었다. 식량이 안정적으로 확보되자 유럽에서는 인구가 큰 폭으로 증가했고 이는 노동력의 향상으로 이어졌으며 이 노동력은 이후 산업혁명과 공업화를 뒷받침해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반응형
LIST

댓글